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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자 조지 오글 목사
1929. 1. 17. 미국 펜실베니아 서쪽 탄광지대 핏케언에서 출생
1961. 한국/인천 선교사 파송, 산업전도위원회/도시산업선교 설립
1973. 서울로 이주, 서울대학교 노사관계 전임 강사 감리교신학대학 교수,노동조합 지도자 교육과정 강사 재직
1974. 10. 10. 인권과 민주주의 목요기도회 ‘인혁당사건 보고’
1974. 12. 14. 미국으로 강제 추방당함
1995. 북한방문,국제엠네스티와 러시아 방문(1996)
1998. 김대중대통령 취임식 초대됨
1999. 부산 민주공원 개원식 등 수 년동안 6차례 한국 방문
2002. 6. 10. 제 33주년 6.10민주항쟁 기념식에, ‘민주주의 발전 유공 포상’ 국민포장수상
2020. 11. 15. 콜로라도주 라파예트의 은퇴 커뮤니티에서 91세로 소천
조지 오글(한국명 오명걸) 목사 (1929-2020) 소개글
조지 오글 (George E. Ogle) 목사(이하 오글 목사)는 1929년 1월 17일 광부들의 마을인 펜실베이니아 핏케언 (Pitcairn)에서 여섯 자녀 중 네 번째로 태어났습니다. 오글 목사는 1951년에 메리빌 대학을, 1954년에 듀크 신학 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듀크에서 졸업한 후, 그는 복음주의 연합형제교단에서 목사로 안수를 받았으며 후에 이교단은 감리교회와 통합되어서 지금의 연합감리교회가 되었습니다. 같은 해 전쟁이 끝난 후 한국으로 파송받아 영어를 가르치고 한국 감리교회에서 3년 동안 청소년들과 함께 일했습니다.
한국이 산업개발을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오글 목사는 한국교회와 함께 일자리를 얻기 위해 도시로 몰려드는 노동자들을 위해 평생 사역하는 선교사가 되고 싶다고 결심했습니다. 이 새로운 사역을 준비하기 위해 그는 1957년 미국으로 돌아가 시카고에서 공부하면서 Ecumenical Westside Christian Parish의 일부인 도심 상가 교회에서 목사로 봉사했습니다. 교회 근처 클리닉에서 시카고 유아 복지(Chicago Infant Welfare Society)의 공중 보건 간호사로 일하던 도로시 린드만 (Dorothy Lindman)을 만나 1959년 5월 9일에 결혼했습니다. 일리노이주 에반스턴에 있는 개렛 신학교에서 한 학기 수학하고, 그들은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기차와 화물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 한 달 만에 한국에 도착하였습니다.
오글 목사 부부는 서울에 있는 연세대학교에서 1년 동안 한국어 공부를 한 후 감리교 감독님으로부터 산업 항구 도시 인천에서 거주하면서 일하도록 파송받았습니다. 그들의 네 자녀(마틴 찰머, 캐시 아일린, 카렌 마리, 크리스틴 나오미)는 모두 한국에서 태어났습니다. 오글 목사와 한국 동료들은 인천 도시산업선교회(Incheon Urban Industrial Mission; UIM)를 설립했고 가족은 도심의 작은 한국 집에 살았습니다. 그 지역의 목회자들과 따뜻한 바닥에 놓여있는 방석에 앉아 회의를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종종 책상을 밖으로 옮기곤 했습니다. 첫 10년 동안 오글목사와 3명의 한국인 목회자가 주요 직원이었습니다. 두 명은 공장에서 일했고 한 명은 부두에서 일을 했습니다. 오글 목사는 제철소와 철도 차량 상점에서 목사로 일했습니다. 그 후 10년 동안 그들은 노동자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정의와 존중을 위한 투쟁에 동참했습니다.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초기에 이미 대한민국은 노동법이 제정되어 있었지만, 1961년 쿠데타로 군대가 집권하면서 박정희 장군은 1963년 한국의 대통령이 되었고 한국 정부는 군사 독재가 시작되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노동자들을 희생시키면서 “경제적 기적”을 위한 계획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휴전상태와 국가안보법을 사용하여 사회의 모든 영역을 장악하고 체제에 대한 비판을 무시하고 반체제 인사들을 “공산주의자”라고 거짓 비난했습니다.
1971년, 오글 목사는 인천도시산업선교회의 지도력을 한국인에게 넘겨주고 미국으로 돌아가 위스콘신 대학교에서 국제산업에 관한 박사 학위를 마쳤습니다. 학위를 마친 1973년, 서울 대학교에서 초청을 받아 5년 임기의 노동관계에 대한 교편생활을 위해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상황은 악화되었습니다. 박 대통령은 유신 헌법을 통해 종신집권을 하고 있었습니다. 인천도시산업선교회 동역자들을 포함한 많은 목회자들이 국가의 민주화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습니다. 오글 목사의 수업은 학생들의 시위참여로 인해 종종 취소되었습니다. 그는 기독교 수감자 가족이 주최하는 기도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중 인혁당 사건 가족들은 오글 목사에게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음모를 이끌었다는 거짓 누명을 쓰고 사형을 선고받은 여덟 명을 위해 기도할 수 있겠냐고 물었습니다. 오글 목사는 기도회에서 그들을 위해 기도했고 공개적으로 합법적인 재판을 요청했습니다. 그는 1974년 12월 14일 심문을 받고 한국에서 추방되었습니다. 도로시 여사와 그의 자녀들은 1975년에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오글 목사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갑작스럽게 옮기는 동안 많은 지원을 받았습니다. 애틀랜타에 소재한 에모리 대학교의 캔들러 신학교에서 가르치도록 초청받았고 교회 사람들은 사택을 준비해 주었습니다. 1975 년부터 1981년까지 캔들러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특히 지역 사회봉사에서 학생들을 감독하는 것을 즐거워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또한 인천도시산업선교회의 작업과 그의 추방에 관해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Liberty to the Captives)’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오글 목사 가족은 워싱턴 DC로 이주했고 오글 목사는 1981 년부터 1991년까지 총회 및 연합 감리교회 사회국에서 사회 경제 정의를 담당하며 United Farm Workers와 Cesar Chavez를 포함한 다양한 사회 운동을 지원했습니다. 그는 1984년 기독교대한감리회 창립 100 주년 기념식에서 연설하도록 초청받아 추방 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오글 목사는 또한 자신의 저서인 South Korea: Dissent within the Economic Miracle (Zed Press: 1990)에서 한국 노동 운동에 대해 썼습니다.
1991년 오글 목사는 은퇴 후 일리노이연회의 공공 정책 부서인 Illinois IMPACT의 이사가 되었습니다. 도로시 여사와 많은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으로 그는 지난 몇 년간 주 전역의 교회 사람들을 교육하고 누진세 개혁에서 보편적 의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제를 옹호하는 데 보냈습니다. 한편 오글 목사는 지속적으로 한국의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글을 썼습니다. 오글 목사는 1998년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 초청과 1999년 부산 민주공원 개원 등의 행사로 수년 동안 여섯 번이 넘게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오글 목사는 한국 내 문제뿐 아니라 탈북자 문제에도 관심을 두었습니다. 1995년 오글 목사는 한국계 미국인 평화 운동가들과 함께 북한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1995년과 1996년에 그는 통역사로 국제 앰네스티와 함께 러시아를 여행하여 그곳에 있는 서류 미비 탈북자들을 도왔습니다. 2002년 오글 목사와 Dorothy는 마지막으로 한국을 방문해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으로부터 인권상을 수상했습니다.
일리노이 주 스프링 필드에서 보낸 은퇴 초기, 오글 목사는 아이들을 지도하고 푸드 뱅크를 위해 빵을 모으고 수업을 들으며 시와 소설과 역사 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와 도로시는 조지아주 마리에타로 이사했고 첫 손자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의 생애의 마지막 18년은 콜로라도 주 라파예트에서 살았으며, 2012년 오글 목사는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 대한 본인들의 경험과 한국에 대한 관찰을 결합해 회고록: 한국에서의 우리 삶과 우리 삶의 한국 (Our Lives in Korea and Korea in Our Lives)을 출판했습니다.
아내 도로시 린드만 오글, 네 자녀인 마틴(며느리: 리사 슈워츠 오글), 캐시(사위: 찰스 아킨스), 캐런(사위: 폴 포흐만), 크리스틴, 그리고 그의 6명의 손자 마야와 시몬 포흐만, 노아와 루카스 데이비스, 그리고 사이러스와 린네아가 후손으로 있습니다.
“내 인생에서 한국에서 보낸 시간은 단 12년뿐이지만, 나의 정체성과 마음은 한국과 가장 많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나는 인혁당 사건에서 목소리를 냈다가 추방당한 인물로 종종 회자됩니다. 내 인생의 몇 개월 동안 일어난 예상치 못한 사건이었습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성취는 인천도시산업선교회에 참여했던 것입니다. 나는 우리가 한국 노동운동의 보전과 성장에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정도는, 한국 역사의 한 조각을 이루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건방진 주장이죠! 하지만 내가 특정한 시간과 특정한 장소에 특정한 사람들과 거기에 있었다는 사실은 틀림없으며, 우리는 함께 노동권의 민주주의적 표본을 확립하는 데 일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