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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선교사 George E.Ogle, 목사 오명걸이 그립습니다 _ 김도진 목사
  • 작성자 관리자
  • 조회수 38
2025-09-18 10:30:46

 

 19741214일 인혁당 사건을 빌미로,군사정부가 강제출국 시킨 조지 오글 목사님의 출국 비행기 안에서 남몰래 전해진 한 장의 엽서가 있었습니다.

 

오글 목사님,안녕히 가십시오.

저는 한 젊은이입니다.(제 이름을 쓸 수 없습니다.)

저희 대부분은 목사님께서 저희 나라의 진정한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일하셨다는 것을 압니다.

저희 마음도 목사님과 함께 울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이름은 역사에 남을 것입니다...

제발 건강하십시오.

 

이 엽서는 가족조차 동반할 수 없었던 당시 군사정부의 몰염치한 강제출국의 폭거를 겪는 오글 목사님이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민주시민의 마음이기도 했습니다. 그 때 그 젊은이의 바램은 이제 현실이 되었고 역사가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사회가 되었고 시민들은 민주적 가치를 맘껏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감사한 마음으로 조지 오글이란 이름을 한국의 현대사에 기록해 드렸습니다. 2020년 제33주년 610민주항쟁 기념식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그 공덕을 기리며 목사님께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1115일 오글 목사님의 소천 소식이 전해졌을 때 각계각층의 인사들은 한결같은 깊은 애도와 감사로 오글 목사님을 기렸습니다.

한 평생을 예수처럼 살다가신 또 한분의 의인이 소천 하셨습니다”.

오글 목사님은 외국인이자 종교인으로서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을 해외에 알릴 수 있었던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한국의 민주화에 기여한 목사의 업적과 뜻을 정리하고 기릴 것입니다

고인의 약력을 보면 한국 현대사가 고스란히 나와있습니다. 내 고교 대학시절 오글 목사님 이름은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어린 여공들의 보호자, 유신반대, 민청학련 인혁당사건 진실 전파 등으로 깊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목사님 곁엔 도로시 오글 여사가 늘 함께 했고, 지금도 도로시 여사는 한반도 평화를 위해 정말 간절하게 기도하고 행동하고 있는 걸 페북을 통해 보고 있습니다. !, 이 분들 앞에서 무어라 할 말을 찾을 수 없습니다. 조지 오글 목사님, 하나님 곁에서 영원한 평화와 안식을 누리소서. 도로시 오글 여사님, 한반도 평화가 자리잡는 날까지 건강 하소서.

고인께서 싹 틔운 민주화의 꽃을 소중히 지키고 활짝 피우겠습니다. 그 뜻을 간직하고 기리겠습니다”.

대통령은 국민의 마음을 담은 훈장과 함께, 원고 없이 국민 앞에 올린 기념사에서 익숙한 이름들을 따뜻하게 불러드렸다. 이소선, 박형규, 조영래, 지학순, 조비오, 박정기, 성유보, 김진균, 김찬국, 권종대, 황인철, 배은심, 제임스 시노트, 조지 오글..... 눈물이 핑 돌았다. 이 분들은 두 분 빼고 이미 모두 돌아가셨다. 끔찍한 고문과 국가폭력에 맞서 약한 자들의 편에서 거칠지만 따뜻한, 고결한 삶을 살다 가신 분들이다”.

이렇듯 오글 목사님은 우리 사회에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기억과 기억들

 

조지 오글 목사님은 미국의 대공황 시기인 1929년 펜실베이니아에서 나셨고.유럽계 이민자들이 대부분인 피츠버그 인근의 작은 철도 도시에서 대부분의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합니다.부지런한 철도 노동자였던 아버지를 기억하고 ,따듯하고 유머가 많았던 어머니를 기억하는 걸 보면 그 영향이 목사님의 성품에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오글 목사님은 한국인 노동자들과 격의 없이 어울려 지내시고 목사님의 용현동 사택을 계속해서 찾아 오는 거지들을 빈손으로 보낸 적이 한번도 없었다”.

1954년은 오글 목사님이 듀크대학을 졸업하고,목사안수를 받은 후 해입니다.그 해 오글 목사님은 미국연합감리교회 소속 선교사로서 한국을 찾습니다. 그것은 한국전쟁 직후 어렵고 힘든 한국민과 함께 하기 위한 목사님의 선택이었습니다. 그 선택은 충청도 지역에서의 농촌선교로 또 인천지역에서의 노동사역으로 구체화 됩니다.

특별히 도시산업선교는 시대의 변화를 읽어내며 그 변화 속에서 그리스도의 증인된 삶을 몸으로 살고자 했던 목사님의 각별한 선택이었습니다. 이런 목사님의 선택은 스스로에게 엄격했고 이웃에겐 따듯했습니다.

조화순 목사님의 회고는 이렇습니다.“오글 목사의 제안에 따라 도시산업선교회 실무자 훈련과정으로 동일방직에 취업하였을 때, 오글 목사는 매일 같이 스스로 노동자가 되어라 노동사회에도 질서가 있다. 그 질서를 배우라.노동자들을 선교하겠다는 건방진 생각은 버리라. 또 어떤 이는 선교사님은 합리적이고 명석하며 사리판단이 정확하셨으며 늘 검소한 삶을 사셨습니다고 말합니다.

1960년대의 한국은 한국전쟁의 참화를 거둬내고 잘 살아보세를 외치며 본격적 산업개발을 시작합니다. 그것은 저렴한 노동력을 상정한 국가주도형 산업개발이었습니다. 산업이 개발되고 경제가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부작용도 컸습니다. 대다수 국민의 희생을 강제하는 산업화였습니다. 대다수 국민인 노동자들은 억압당했고 착취당했습니다. 몸이 부숴져라 일하지만 형편은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오글 목사님의 도시산업선교는 바로 이런 사람들을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됐습니다. 사람들을 찾아가는, 그랬기에 목사님은 그런 사람들과 삶의 궤를 같이 했습니다. 노동자들이 가지고 다니는 노란색 밴또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고 그런 사람들의 자식들이 다니는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당신의 아이들을 입학시켰고, 인천지역 일대의 공장을 찾아 다니면서 노동자들을 직접 만났습니다.

“TV가 귀한시절 동네아이들에게 TV 프로는 굉장한 오락거리였지요. 그 때 타잔이란 외화프로가 있었는데 ,무성하게 우거진 밀림을 헤치며 주인공이 아아아 아 소리치곤 했는데 그 타잔소리를 외국아이가 흉내 내는거야 !정말 신기하고 또 웃겼지,하교 앞 운동장 한쪽에 커다란 등나무가 있었는데 그 등나무 가지를 붙잡아 타고서 아아아 그랬어요.”

오글 목사님이 도시산업선교회 사무실로 출근을 하시다가 늘 싸갖고 다니는 도시락을 버스에 두고 내린거야,그 때 인천 송도에서 동인천까지 시내버스 6번이 다녔거든요.숭의교회 가까운 목사님 집근처 정거장에서 버스를 탔다가 그만 노란 밴또 도시락을 버스에 두고 내리신거야. 퇴근하고 그 도시락을 찾으러 6번 버스 회사가 있는 송도까지 간거야. 그 때만 해도 외국인 보기가 쉽지 않던 시절인지라 왠 키 크고 잘생긴 미국 남자가 분실한 도시락을 찾으러 왔다니 얼마나 신기했겠어요!”그렇게 오글 목사님은 그 시절의 여느 한국 노동자들처럼 그런 일상을 사셨습니다.

 

인천도시산업선교회와 조지 오글

 

1959년은 조지 오글 목사가 3년간 한국에서의 단기 선교사 사역을 마감하고 미국으로 귀국한 해입니다. 그 때 오글 목사님은 듀크대학 재학시 접했던 프랑스 노동사제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프랑스 노동사제들은 가톨릭 신앙을 떠난 프랑스 노동자들을 위해 스스로 노동자가 된 사제들을 일컫습니다. 프랑스에서 도미니코회 수도자였던 자크 뢰브 신부가 노동 계급이 처한 상황을 연구하러 프랑스 남부의 항구도시 마르세유로 갔다가 스스로 마르세유 부두의 하역 노동자가 되었는데 이것이 프랑스 노동사제의 시작입니다. 그 후 파리 선교회를 필두로 프랑스 선교회, 여러 수도회 소속의 수사들, 재속 사제들이 그 뒤를 따라 직접 노동자가 되었고 그 수가 한때 백 명을 넘었습니다. 그들은 수사복 대신 기름과 땀에 전 작업복을 입고 노동자로 살았는데 그런 노동사제들의 모습이 당시 프랑스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고 그만큼 사목활동의 영역이 넓혀졌습니다.

프랑스 노동사제에 대한 깊은 관심은 조지 오글 목사님의 도시산업선교의 단초가 됩니다 도시산업선교를 단초하는 또 하나 관심이 있었는데 그것은 오글 목사님이 한국 농촌에서 목격한 이농향도(移農向都) 현상이었습니다. 한국 농촌에서 많은 농민들이 농업으로써 생계유지가 어렵자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도시로 떠나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당시 군사정부의 산업화 정책은 저임금 노동력에 바탕한 노동집약적 산업에 초점이 맞춰 있었고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농촌 인구의 도시 유입을 가속화시키는 저곡가 정책이었습니다. 오글 목사님은 한국의 이농향도를 보면서 귀국 한 1957, 미국 시카코에서 산업선교와 노사관계에 대한 공부를 합니다. 낮에는 루즈벨트대학교에서, 밤에는 맥코믹 신학교에서 공부할 만큼 몰두합니다. 이것은 나중에 한국에서 한국근로자의 실태와 교회의 과제’,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라는 저서를 남기고 서울대학교 노사관계 전임강사, 노동조합 지도자 교육과정의 강사로 활동하는 목사님의 이력이 되기도 합니다.

무엇이 오글 목사님으로 하여금 이런 열정을 갖게 했을까? 오글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이발소에 있는 아저씨 그 분이 머리를 깎으면서 항상 노동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조그만 아이 때부터 노동근로자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듀크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할 때 노동자 신부(Worker-Priest) 그것에 대해서 교육을 받고 마음에 나도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는 감동이 왔어요.”

이같은 일련의 과정을 보면 오글 목사님의 도시산업선교는 하나님의 크신 섭리 가운데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오글 목사의 귀를 열어 프랑스 노동사제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하셨고 하나님께서 오글 목사의 눈을 열어 한국의 이농향도 현상을 보게 한 것이 분명합니다. 특히 프랑스 노동사제에 대한 목사님의 감동은 향후 인천도시산업선교회의 사역을 규정짓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오글 목사님의 도시산업선교회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오글 목사님은 1959년 도로시 린드맨과 결혼한 후,19602월 일본을 경유하는 한달 간의 긴 항해 끝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고,1962년 인천 화수동의 15평짜리 초가집에 인천도시산업선교회를 설립합니다.

 

약한 것을 강하게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정확한 이름은 기독교도시산업선교회입니다.인천도시산업선교회가 일제시대부터 대규모 군수 공장이 밀집해 있던 인천 동구 화수동에서 그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 이 지역은 이농향도의 최종 종착지 중 하나였고, 실업이 만연했던 당시 상대적으로 일자리가 많은 곳으로 노동자들이 넘쳐났던 곳이었고, 한국의 산업화와 급격한 도시화가 응축해 있는 곳이었습니다. 도시산업선교를 위한 최적지였습니다. 오글 목사님은 이 곳에서 노동자의 지위향상과 복지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게 됩니다.그리고 이 곳에서 함께 일할 한국인 사역자를 찾았고, 이 곳에서 조승혁 목사님 조화순 목사님을 한국인 사역자로 세웁니다. 인천도시산업선교회의 1, 2대 총무로 일하게 됐던 조승혁 목사님과 조화순 목사님이 오글 목사님의 제안에 따라 인근의 대성목재와 동일방직에 취업하여 노동자로 일한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이었습니다. 조화순 목사님은 기독교 신앙의 성육신 사건이 우리에게 체험화되면 이런 일은 언제나 가능하다고 말합니다.그리고 성육신적 사건이 우리의 일상에서 나타나면 약한 것이 강하게 된다고 말합니다.예수의 성육신이 죄인된 인간을 구원하는 것처럼 우리 신앙의 성육신적 사건은 약한 것을 강하게만듭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래된 인천도시산업선교회의 흑백 기록 사진에는 약한 것을 강하게란 표어가 유난히 많습니다.

 

우리는 선교사 George E.Ogle, 목사 오명걸이 그립습니다

 

오글 목사님의 인천도시산업선교회가 자리한 인천 동구에 어느 여성 노동자의 길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사오십년 전, 힘들고 가난했던 시절이 곳은 어린 여성들이 힘든 부모를 돕고, 오빠와 동생을 공부시키기 위해서 학교대신 공장으로 발길을 옮겨야 했던 노동의 거리였습니다.

이 노동의 거리를 한 쪽 끝에서 또 한쪽 끝을 이으면 동일방직민주노조운동으로 알려진 동일방직과 그 동일방직 민주노조 여성 집행부를 양육했던 인천도시산업선교회가 연결됩니다. 이 연결은 세상과 교회의 관계를 은유하고 ,이 길은 산업화하고 도시화하는 세상 한 가운데 서서 복음을 증거하려 했던 인천도시산업선교회를 기념하며 하나님께로부터 들려오는 기쁜소식복음을 산업화의 노동자들에게 도시화의 가난한자에게 전했던 인천도시산업선교회의 일꾼들을 기념하는 거리입니다. 이 일꾼들의 첫머리에 조지 오글 목사님이 계십니다.

1928년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가 2020년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간 조지 오글 ,오명걸!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이 기쁜소식을 당신의 손에 들고 이 땅을 찾아온 하나님의 종입니다. 우리는 선교사 George E.Ogle, 목사 오명걸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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